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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0일

다시 교회를 갔다


 











오늘은 내가 근 5년만에 다시 교회를 간 날이다. 얼마 전부터 다시 교회를 가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고, 이번에는 그 마음이 그냥 사라지도록 냅두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붙잡았다. --- 서울역 10번 출구로 나와서 교회로 올라가는데 이전에 친구와, 아들과, 혼자, 땀 흘리며, 비 맞으며 올라가던 때 기억이 났다. 교회 주차장에서 본당으로 올라가자면 나무로 만든 계단을 통과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주대범 장로님이 고치신 계단이다. 칠팔 년 전, 내가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점심 식사할 때마다 내가 앉은 자리로 와서 큰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주시던 장로님이 떠올랐다. 장로님, 저를 환대해 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단을 오르며 짧게 기도를 드렸다. 코너를 돌자 주보를 들고 계신 교우들이 보였다. ---- 예배의 예전 하나하나가 마음에 다가왔다. 몸, 목소리, 찬양, 기도를 통해서 내 신앙을 표현하고 또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집에서 혼자 성경 읽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 오늘 교회 주보 전면에는 돌아온 탕자 그림이 인쇄돼 있었다. 찬송은 "여러 해 동안 주떠나"였고, 성가대 찬양은 "나에게 돌아오라"였고,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였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유머라는 생각이 들었다. --- "3월 달에는 주일이 다섯 번 있습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담임 목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희 교회는 이렇게 주일이 다섯 번 있는 달에는 마지막에 주일에 어린이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 러그가 깔린 강대상 계단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담임 목사는 아이들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교인들에게는 등을 보이고) 돌아온 그림책을 들고 아이들에게 3분 정도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담임 목사가 교회의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전교인과 함께 바라보는 경험은 감동적이었다. 목사가 그림책 속의 한 인물을 짚으며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개중에 제일 큰 남자 아이가 말했다. "백 퍼센트 아버지요!". 목사는 웃으며 백 퍼센트 맞다고 대답했다. ---- 매주 진행하는 성찬식에 참여했다. 너무 오래간만에 참여하다 보니 순서를 까먹었다. 앞으로 나가 목사가 주는 떡을 두 손으로 받은 후 기도하며 먹었다. 그리고 내 자리를 향해 걸어 들어왔다. 포도주도 있다는 걸 깜박한 것이다. '떡과 포도주' 중에서 포도주를 잊다니. 다시 돌아들어가 포도주를 받아 마셨다. ---- 예배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었다. 식판을 들고 빈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 옆에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니 아까 예배 시간에 그 아이 같았다. 나는 작은 용기를 내서 "네가 아까 예배 시간에 앞에 나가서 목사님 말씀 들었던 거 맞지?"라고 물었다. "예" "백 퍼센트 아버지요 라고 했던 말 기억난다. 몇 학년이니?" "5학년이요". 다른 교인과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데, 밥을 다 먹은 옆 자리 소년이 내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와, 이렇게 예의 바른 소년이라니! 감동을 받는 나는 "이름이 어떻게 되니?". 아이가 이름을 말해줬고 나도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 점심을 다 먹고 지인 A와 함께 차를 마시러 갔다. 먼저 온 교우들이 있어서 합석을 했다. 대부분 40대였다. 내가 처음 보는 교우들도 여럿 있었다. 폭싹 속았수다 얘기도 하고, 잘잘법 얘기도 하고, 탄핵 재판 얘기도 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성경 구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정말 너무 오래간만에 경험하는 성도의 교제였다. A와 나는 중간에 먼저 일어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과거에, 오늘, 나를 환대해 주신 분들 얼굴을 떠올렸다. 이번에 다시 교회를 나가면서 큰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 그냥 정기적으로 나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정기적인 예배 참여가 내 삶에 질서를 잡아주었으면 한다. 질서, 내년에 60이 되는 내가 지금 가장 갈망하는 것이다.  

2025년 3월 26일

섬네일 회의를 했다













오늘은 내게 참 특별한 날이었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로부터 진한 신뢰라는 선물을 받은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찐으로 신뢰한다. 서로가 신뢰하는 팀이라니! 퇴근 길에 가족 단톡방에 "아빠가 오늘 참 특별한 하루를 경험했어. 어떤 기쁨은 '넘 좋다'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꼭 '감사하다'는 말이 붙어야만 하는 거 같아. 아빠의 요즘이 그러함"이라고 썼다. ---- A가 내 자리로 다가와 이혁진 작가의 <광인>을 추천해줬다. 

2025년 3월 24일

<아라비아로 간 바울>(벤 위더링턴 3세 지음, 북오븐)을 사려고 했다.

 












어제 지인 A가 sns에 <아라비아로 간 바울>(벤 위더링턴 3세, 제이슨 마이어스 지음, 오현미 번역, 북오븐)에 대해 언급한 짧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참고로 이 책의 부제부터 밝히면: "회심 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까지, 감춰진 시간을 찾아서".

지인의 짧은 글은 이러했다.
바울이 매력적인 유대인 미리암을 만난 후 혼자 말한다. “이런 느낌은 빨리 털어 버리는 게 아마 최선일거야”
이상하게 이 글을 읽는데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대부분의 느낌들은 "털린다". 안 털려고 해서 문제이지, 털려고 하면 털린다. 지인의 글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됐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느낌들을 너무 두려워 할 필요 없다. 그리고 빨리 털 수록 쉽게 털린다).
어제 무척 감명을 받았기에 오늘 퇴근길에 서점에 가서 그 대목을 직접 확인해봤다. 81 페이지에 나왔다. "미리암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사울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을 사려고 했는데 이런, 도서상품권을 회사에 두고 왔다. 내일 사야겠다.

2025년 3월 21일

신입 교육을 마쳤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후배들과 이런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참 감사하고 행복했음. 동료 A가 지난 30년을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라고 물었는데  내 30년은, 이웃이나 내 스스로가 조금만 원칙을 벗어나도 용납하지 못하다가 조금씩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배움으로써 이웃 그리고 나를 용납하게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말함. 


세상의 어떤 직장인이 이렇게 후배들이 경청해주는 가운데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을까? ㅠㅠ 

많이많이 고마움.


2025년 3월 20일

신입 교육 준비를 했다














내일은 내가 신입PD 교육을 맡은 날. 회의실을 예약함. 원래 신입 피디 한 명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잘잘법 팀원들도 같이 듣는 걸로 정해졌음. --- 오늘 같이 점심을 먹던 편성부의 두 동료도 강의 얘기를 듣더니 참석하고 싶다고 함. --- 또 다른 입사 2년차 후배 두 명도 소식을 듣고는 참석 의사를 밝힘 --- 그래서 총 8명 앞에서 강의를 하게 됐음 : ) 참고로 강의 제목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프로그램 제작 및 기독교 출연자 섭외, 발굴을 하기 위한 PD의 지도".  내가 30년 동안 이 회사에서 피디로 일하며 알게 된 좋은 사람들과 고민했던 주제와 질문들을 전달하려고 한다. 

2025년 3월 15일

<콘트라베이스>(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를 읽고.

 













십 년 쯤 전에 <세바시>팀에서 일 년 정도 일한 적이 있다. 그때 같은 팀원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어느날 팀원 중의 한 명인 A가 내게 책을 한 권 선물해줬다. 선물 받은 책을 십 년이 지난 오늘 읽었다.
소설의 형식은 내가 싫어하는 독백체였다. 소재는, 내가 좋아하는 '악기'와 '연주'를 다루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뒤, 독백이라는 형식이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다. 주제 때문인 거 같다. "세상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악기를 연주하는 삶도 의미가 있는가". 은퇴를 일 년 앞두고 지난 30년의 '연주'를 자주 곱씹어보는 나였기에, 이 남자의 독백을 들으며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계속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었다. 다만, 나라면 그가 지금 하려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이야기'로 남아야지 '에피소드'로밖에 남지 못한다면 너무 슬프고 아쉽다.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책은 여럿 알고 있다. <향수>, <좀머 씨 이야기>, <비둘기>. 하나 그의 책을 읽은 건 이게 처음이다. 번역자에 따르면, 쥐스킨트는 이 <콘트라베이스>를 "1984년 스위스의 디오게네스 출판사를 통하여 발표하였으며, 이것은 그 후 현재까지 독일어권 나라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희곡으로,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에선 내가 회사에 입사하던 해인 1993년 3월10일에 초판 1쇄 발행. 1999년 7월10일 초판 39쇄. 2000년 2월10일 신판 1쇄. 2015년 5월30일 신판 38쇄.
그러니까 A가 내게 선물해 준 건 신판 38쇄. 책을 다 읽고 10년만에 A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냈다.

2025년 3월 13일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로버타 본디 지음, 황윤하 번역, 비아)를 읽고.

 













새롭게 섭외한 A 목사님의 네 편의 강의 중 두 번째 편 편집을 마치고, 오늘 업로딩 되는 영상 섬네일을 팀원들과 함께 정한 후 퇴근했다. 오늘도 퇴근길에 단골 카페에 들려 <주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라>(로버타 본디 지음, 비아)를 읽었다. 3세기~6세기 무렵 사막에 들어가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소위 사막의 교부들과 수도사들)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는 책인데 이상하게 몹시 빠져들어 읽고 있다. 사실 나는 사막의 교부들 금언집들은 이전에 이미 꽤 읽었는데, 이상하게 이 책은 새롭게 다가온다. 아주 짧은 서문(이 책에선 '들어가며'라는 이름이 붙어있다)은 너무 인상적이어서 천천히 세 번을 읽었다. 너무 짧은 서문이라 통째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을 처음 만난 건 2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두고 씨름하고 있었지만 말이지요. 다시 저는 제 지성과 마음을 모두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신앙의 형태를 찾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에 앉아 저는 6세기 마부그의 필록세누스(Philoxenos of Mabbug)가 쓴 설교집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느님과 다른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저는 최대한 많이 이 전통에 속한 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제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계심을,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있음을 가르쳐주었지요. 그들의 따뜻함, 통찰, 도움은 제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고, 제 삶 속의 지속적인 원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려운 현대 세계에서 이들은 여러분을 위한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 저자 로버타 번디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1941년생이었다. 이름 때문에 난 저자가 남성인 줄 알았는데 여성이었다. 암산이 안 돼 계산기로 계산을 해보았더니 저자가 이 책 속 인물들을 처음 만난 건('20년 전') 그녀가 26세였을 때였다. 도서관에서 1500년 전 설교문을 '놀란 눈'으로 갈급하게 읽어내려가는 20대의 저자를 상상해 보았다. 어떤 마음이면, 수천 년 돼 돼 바스락거리는 글을 마치 생수를 들이키듯이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란에 이런 글이 보였다. "신학자 패트릭 헨리는 [그녀를] '기억의 마법사', '학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 학자'로 평가했다." 그녀가 쓴 책 중에는 <고양이 닉>(Nick the Cat)도 있었다. -----  1장 시작, 2장 사랑, 3장 겸손, 4장 정념,을 다 읽고 지금 5장 기도,를 읽고 있다. 마지막 6장은 '하느님'이다. 사막의 교부들에 따르면 겸손은 " '나'를 다른 사람들과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차별화된 존재라고 여길 필요가 없음을 뜻합니다 (....)겸손을 익힌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견주어 애써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 다른 사람이 어떤 부분에 있어 나보다 무언가를 더 잘한다 해서 괘념치 않는 것을 뜻합니다. 교만은 결국 상처를 남기지만 , 겸손은 두려움을 없앱니다. 우리를 진실로 용감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은 겸손입니다". (p.182-183). 그녀 덕분에, 나도 오래 돼 바스락거리는 지혜에 쫑긋 귀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