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교회에 갔다. 당연한 일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어제 토요일, 마음 속 갈등으로 마음의 힘을 잃었을 때 내 마음에 바로 떠오른 문장은 "다음 주에도 또 돌아오는 예배, 까짓것 하루 빠지지, 뭐" 였고, 그 다음 이어진 문장은 "그래, 넷플릭스나 하루 종일 봐야지"였다. 어제 오후, 신이 내게 베풀어주신 자비 덕분에 난 내 마음 속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고 오늘 오전 10시55분, 루터교회 주차장에 서있을 수 있었다. ---- 교회에 도착하면 교회를 배경으로 셀카를 한 장 찍는데, 오늘은 그러질 못했다. 찍으려고 할 때마다 교인들이 나타났다. 쉰아홉이나 돼가지고 예배 시작 5분을 남겨놓고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셀카를 찍을 배짱은 없었다. ------ 요즘 예배 시간에 기억하려고 하는 게 하나 있다. "감동이 안 와도 괜찮다". 예배의 예전을 하나하나 행할 때 진한 감동이 있어야만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가 아니라는 것. (이렇게 생각하고부터 예배드리는 게 참 편해졌다. 부담이 없어졌다). 감동이나 감정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육체를 지닌 내가, 육체를 지닌 다른 지체들과 함께 전심으로 이 시간 (얼마든지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을 수도 있었는데) 예배 예전에 몸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 이런 시간, 이런 선택 자체가 감사할 뿐. 홀로 집에 있을 땐 부르지 않는 찬송을 이곳에선 부른다. 몇 년 동안 불러보지 않은 그 찬송 가사를 오늘 내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부른다. 영적인 황홀감을 체험하려 애쓰지 않는다. 전통으로 내려오는 예전 순서에 담담하게 내 몸과 마음을 맡긴다. 소리내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 ------ 오늘도 내가 기다리던 성찬식. "이것은 주님이 당신을 위해 흘리신 피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 주시는 주님의 몸입니다". 지체들이 줄을 서서 한 사람 한 사람 성찬을 받는 모습을 바라볼 때 난 참 좋다.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좋다. 이 사실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나는 한 사람의 교인이 성찬 받는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지금 저 교인을 바라보는 그 담담한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그 지독하고 끈질긴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볼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훈련을 성찬식때마다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성찬식때마다 나는 나에게서 조금씩 벗어난다. ---- 성찬을 받기 위한 마지막 줄에 내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소년이 서 있었다. 초등학생이다. 소년의 차례가 되자 목사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소년과 눈높이를 맞췄다. 목사의 한 손이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쌌고, 두 사람의 이마는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목사가 소년에게 하는 말이 들리지는 않았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를 위해서 주시는 주님의 몸이란다". 무언가 한두 마디, 성인들에겐 하지 않은 말을 덧붙였을 것 같기도 하다. "한 주일 또 힘있게 사는 거야, 알았지?". 소년이 부러웠다. 매주일, 목사님과 이마를 맞댄 상태에서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다니! 나도 이마를 맞대고 말해달라고 요청하기엔 내 나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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