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생을 만화로도, 드라마로도 봤다. 누군가 내게 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뭐냐고 묻는다면, 내겐 그건 다음 장면이다.
누군가 장그래가 속해 있는, 그러니까 오과장이 이끄는 팀에 합류했다. 기존 팀원들과 이 사람 사이에 긴장이 느껴진다. 이 남자는 일 때문에 술도 많이 마신다. 그러나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집에 가면 꼭 맥주 한 캔을 혼자 마신다. 회사에선 일 때문에 마신 거고, 자신의 술을 즐긴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점차 신뢰가 쌓여가고 한 팀이 되어간다. 이 사람이 이 팀에 완전히 마음을 연 날이었다. 회사 일로 팀원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간 이 남자가 침대에 조용히 눕자 아내가 묻는다. "웬일이야, 일로 먹은 술은 먹어도 먹은 게 아니라고, 늘 맥주 한 캔은 하고 자는 사람이....".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은 충분히 마셨어". 남자의 "충분히"라는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아, 이제 따로 혼자 더 안 마셔도 될만큼 신뢰하는 사람들을 만났구나.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더 이상 업무만은 아니구나. 너무 다행이다.
2. 토요일이면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만난다. 허락을 받고 함께 외출을 해서 근처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근처 파리바게트에서 함께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두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머니와 헤어진다. 그러고 나는 집 근처 찻집에 가서 혼자 다시 차를 마신다. 그때부터 나만의 차를 마신다. 자주 혼자 묻는다. "아까 충분히 마셨어"라고 하며 그냥 집으로 가는 날이 올까?
3. 이화여대 김혜령 교수가 쓴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를 지난 겨울 우연히 손에 쥐게 되었다.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져서 집 근처 요양원에 모신 즈음이었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였다. 책의 부제는 '약해진 자들과 동행하는 삶의 해석학'이었고 나는 제목보다는 부제에 끌렸다. 책은 총 9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장은 배회를 다뤘다. 왜 치매 환자들은 자꾸 밖으로 나가려 하는지. 둘째 장은 옷차림을 다뤘다. 그들의 옷차림은 왜 종종 우스꽝스러워 보이는지. 두 장을 읽고 검색을 통해 저자의 이메일 주소를 찾은 후 짧은 메일을 보냈다. 이런 내용이었다.
"한 장 한 장을 읽을 때마다 저희 어머님 상황을 떠올리게 되고, 어머님의 존엄, 저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묻게 됩니다. 참 외로운 질문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누군가와 함께 이 고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참 힘이 되고 감사합니다." (*환자와 가족의 "존엄을 지킨다"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4. 이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모시는 저자의 아주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와 사회학적인 분석의 글이 번갈아 가며 한 챕터씩 등장한다. 전자를 읽을 때는 위로가 되었고 후자를 읽을 때는 우리 사회 내 나의 위치가 그려졌다. 양쪽 모두가 힘이 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와닿는 부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내 경우엔 제7장 '돌보는 자의 신학'에 그런 부분이 있었다. 저자는 먼저 이렇게 말을 했다. "돌보는 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이 있다. (...) 그[치매에 걸린 부모]가 어떻게 나를 키워 냈는지, 어떻게 나와 함께 살았는지 잊지 않는다면 그를 돌볼 수 있는 인내심이 조금은 더 생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실망했다. 대뜸 내 속에선 이런 반론들이 튀어나왔다. "누구나 다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대안이 너무 나이브한 거 아니야? 누군가에겐 과거는, 함께한 시간은, 양육받은 <그 긴 시간>은 기억할 때 힘이 되는 시간이 아닐 수 있다고. 추억함이 오히려 고통과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저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기억에 기대어 돌볼 수 있다면, 그 환자와 돌보는 가족은 모두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부모나 배우자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존재로 각인된 사람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래서 돌보는 이에게 필요한 능력은 기억력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5. 잘 돌보기 위해 기억보다는 상상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손가락으로 상상력이란 방향을 가리켜 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그 상상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기억과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상상은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배우고 싶다.
진심으로 추천하는 책이다.
2025.4.26.
신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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