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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5일

기독교 방송에서 성을 다루기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1. <현대문학>엔 '죽비소리'가 있다. 죽비소리는 현대문학이 97년 7월호부터 새로 마련한 서평란 이름이다. 공동 서평자들의 이름이 서두에 나오지만, 각각의 서평을 누가 썼는지는 모르게 되어있다. 이 죽비소리가 제21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김호경의 <낯선 천국>에 대해 '습작 수준도 안된다, 출판사의 이벤트 마인드가 만들어 낸 상품에 불과하다'라고 썼다.
2. CBS 기독교방송엔 <모니터보고서>가 있다. 내가 제작하고 있는 < 정오의 문화저널 > 8월 21일치 모니터평을 그대로 옮겨보면: “극단 이데아의 작품인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을 소개했는데 (.....) ‘밤일’,‘색마’ 등의 성적인 노골적인 느낌이 강했다. 또한 진행에 있어서 진행자들간의 노골적인 표현에 대한 웃음이 많아 진지함이 떨어지는 인상을 주었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면서 난 한 모니터요원을 생각했다. 그는 몇살일까? 남자일까,여자일까? 결혼은 했을까? 그는 ‘진지함이 떨어지는 느낌을 주었다’라고 썼다. 지하철이 서울대역을 지날 무렵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진지한 신음’이란 것이 존재할까? ‘그(!) 신음’조차 진지하게 내야 하는 곳, 그곳은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하는 곳일까?
3. 성폭력과 낙태가 수없이 일어나는 사회. 그리고 그런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성 관련특집 프로그램 또한 수없이 제작되는 우리 사회. 진지한 시그널 음악이 깔리고 ‘특집방송 청소년의 성, 이대로 둘 것인가’ 같은 타이틀을 사회자가 심각한 목소리로 읊는다. 그런 특집, 방송 백 번 해도 말짱 황이다. 방송 중엔 섹스 이야기를 하지만 방송만 끝나면 클리토리스, 피스톤 운동,주름,신음이란 말 쓰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 이런, 한 시간 짜리 특집 방송이 방금 끝났는데도 우린 조금도 더 자연스러워지지 않았다.
4. 이항규 박사가 쓴 책 <대학 없애야 우리가 산다>. 대학제도에 대해서 다루다가 불쑥 저자가 한 독일가정에서 점심 먹던 이야기가 등장한다. 15살 된 아들이 밥을 먹다가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 클리토리스가 뭐예요?” (시그널 음악도 없었다 ). 다른 친지들도 있는데 그 엄마, 낯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그건 여자의 성기 윗 부분에 있는 아주 예민한 성감대야. 너도 나중에 여자 친구와 섹스 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그런 곳이야. 그렇지만 그 부분의 느낌은 여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기에 일률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는 없고, 하여튼 그 느낌에 대해서는 여자 친구와 항상 대화를 해 가면서 그녀의 느낌에 보조를 맞춰가는 게 중요하단다. ” 아들이 짓궂게 또 묻는다. “여자들 모두가 다 똑같은 게 아니라면 그럼 엄마의 경우는 어떤데?” 그러자 그녀, “그건 아버지만 아시는 비밀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되는....”하며 미소로 받아 넘긴다. 이항규 씨의 이어지는 얘기: “그날 점심 시간에 제일 얼떨떨해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5. 26년의 긴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 교회가 나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자연스러움>. 난 그 책에 등장한 그 자연스러운 대화를 난 읽고 또 읽었다. 그 대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그렇다, 맥락이 중요하다.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자신의 몸과 욕망과 쾌감에 대해서 웃으며 말할 수 있는 태도가. 그 사십대 후반의 여인을 게스트로 초청할 수있다면. 그 여인을 초청할 수만 있다면!
6. 그날 연극 평론가 이영미 씨와 장주희 아나운서는 완벽했다. 두 사람은 더듬거리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았다. 두 여자가 자연스럽게 웃는 웃음소리를 스튜디오 안에서 들으며 난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그래, 지금 이 웃음 소리, 몇 개의 성 문제 특집 방송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는 중이야! 이 웃음 소리! 이 자연스러움! ’
7. 지하철이 사당역을 지나고 있었고, 난 여전히 ‘신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섯 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외에 , 여섯 째날 밤과 일곱째 날 아침 사이에 들어가야 할 새로운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듣기에 좋았더라>. 여섯째날 밤 에덴 동산에서 들렸을 <그 소리>가 그분의 귀에 좋게 들렸던 단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건 그 소리가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담과 이브, 요셉과 마리아. 그들이 항상 진지하진 않았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진정한 기독교는 밤에 진지하지 않다. (1997.9.1.)
* 피디 4년차, 서른 초반에, CBS 노동조합 노보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