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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5일

검은 용


 











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갔다. 집에서 지하철 양평역까지 걸어가는 데 15분 정도 걸린다.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건 공든 탑을 쌓는 게 아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우리가 넘어진다는 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게, 그래서 첫 돌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하는 게, 제로(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건 바울의 말처럼, 권연경 교수의 지적처럼, 달리기일 것이다. 가다가 넘어지면,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 다시 달려가면 된다. 넘어졌다고 다시 출발선까지 돌아가서 다시 달릴 필요가 없다. 이 생각이 내게 격려가 되었다. 아, 다시 첫 돌부터 다시 쌓아야 하나? 하는 생각은 나를 얼마나 낙심케 해왔던가. 교회에 도착했는데 복도에 불판이 쌓여있었다. 아싸, 어쩌면 오늘 점심 때 고기를 먹는 건가! 근데, 오늘 무슨 날인가? ---- 설교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뤘다. 예수님은 묻고 명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수없이 들은 설교였다. 오늘은 난생 처음으로 '네 자리'에 꽂혔다. 그 38년된 병자는, 병이 길어지자, 자기 자리에서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을 누렸을 것이다. 텀블러를 올려놓고, 핸폰 거치대를 설치하고, 콘센트를 마련하고, 와이파이 비번을 알아두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아니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잊어먹은 채, 쇼츠와 릴스를 보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나는 그가 하루종일 간절한 시선으로 연못을 바라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자기 자리를 들고 연못가에 가서 자리를 잡은 뒤, 사건과 변화 없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을 즐겼으리라 믿는다. 내 삶의 자리에서 쇼츠와 릴스와 온갖 오락을 치우고 불편한 자세로, 간절한 시선으로 연못을 바라보겠다. 내 자리에 만족하지 않겠다. ---- 점심은 기대했던대로 삼겹살이었다! 삼겹살, 상추,깻잎,쌈장,오이고추,잘 익은 김치와 뜨거운 밥을 먹으며 옆자리에 앉은 A와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A는 초등학교 5학년이고 나는 어떤 게임도 하지 않는다). 대화는 주로 나의 질문과 A의 답변으로 이뤄졌다. "그러니까 집을 짓는 거지?" "네". "자기 집을 짓는 과정 중에 어떤 고난이 있어? 그러니까 방해물이 존재해?" A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가방에서 마인크래프트 책자를 꺼내 방해자들의 리스트를 보여줬다. 다 영어 이름이라서 기억은 하지 못하는데 여러 종류의 나쁜 놈 캐릭터들이 있었다. 검은 용도 있었다. 설명을 듣는데 몹시 흥미로웠다. A는 지하에 집을 짓고 있다고 하면서 지하에 집을 지을 때의 장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자기 집을 짓고 그 안에 머물면 정말 안정감이 들겠는데?" "예.집이라기보다는 은신처 같은 곳이예요".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나도 게임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마음, 난생 처음이었다). 지하에 나만의 은신처를 마련해 두고, 실제 회사에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로그인한 후 그 안전한 은신처 - 이곳에는 당연히 책장이 있다! - 안에 있는 벽난로 옆에 앉아 책을 읽는 캐릭터로 변신해서 하루 10분~15분 정도 보내면 마음이 무척 안정될 거 같다. 거의 큐티를 하는 느낌이 들 거 같다. 특히, 지지상의 하늘에선 검은 용이 날아다닌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위험이 존재해야 은신이 더 달콤한 법이다. "그런데, 캐릭터들끼리 대화도 가능하니?" "예, 가능해요". 요즘 아이들은 조숙하기에 "그럼, 게임을 하다가 다른 여성 캐릭터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있니?" "예, 있어요" "오, 진짜! 누구랑? "엄마요. 엄마도 게임을 해요". A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완전히 한방 먹었다. "엄마는 아니지, 엄마 말고 ㅋㅋㅋ" 빵 터진 나는 웃고 있는 A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고 그 순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집에 와서 책을 좀 읽다가 한숨 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안양천을 한 시간 산책했다. 아름답고 행복했다. 오늘은 특별히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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