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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6일

< 교회의 사회적 책임 2.0 포럼 - 문화편 > 발제문 (2009.6.11)

2009년 문화선교연구원과 기윤실이 공동으로 주최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2.0 포럼-문화편 에 참석하여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토론자들은 미리 간단한 발제문을 써서 냈는데요저의 발제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목: 오래된 이야기를 '새롭게'하소서 

1. 저는 CBS TV에서 ‘새롭게 하소서’라는 간증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한국 대중영화 속의 기독교’(2002년)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는데 아마 그걸 본 기윤실 관계자가 이 토론회에 저를 초대해주신 것 같습니다. 기윤실에서 보내주신 포럼기획안과 기조발제문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 ‘다른 이야기’는 없는 것일까?  
■ 창세기, 문화명령, 리처드 니버, 변혁이론, 기독교세계관, 그리스도인의 실천, 사회와의 소통. (대학에서 IVF 활동을 했기에) 제게 아주 익숙한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같은 이야기만 해오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소통 > 이란 화두가 풀리지 않고 몇십 년 동안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사실) 자체가 이 < 오래된 접근법 > 으로 그 < 오래된 문제 > 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 내 주위에 있는 이웃, 그의 삶, 그의 유머를 < 즐기고 격려하라 > 고 하는 대신 위험요소는 없는지 < 주의하고 분별하고 조사하라 > 는 접근법은 < 실행불가능 >  한 측면이 있습니다. 충분히 < 리얼리스틱 > 하지 못한 이 접근법에 집착할 때      < 나 > 와 < 타인 > 사이의 소통은 고사하고 < 나 > 와 < 내 자신 > 도 서로,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짧은 글이라 길게 설명하지 못하고 좀 단정적인 표현을 쓰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2. 이명박도 ‘소통’을 이야기한다   
■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서 촛불을 보며 ‘내게 소통이 부족했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옳기에 네가 변해야만 이 갈등이 해결된다’라는 말을 ‘어떻게 소통하면 좋을까?’라고 묻는 '독특한' 습관이 있습니다.  그가 소통을 고민할 때 하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너를 변화시킬까?’입니다. < 너 > 가 변하고 < 나 > 는 변하지 않으니 그 결과는 < 나 > 의 확산과 < 나 > 의 확장입니다. 

■ 그런데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운동도 < 확산 > 과 < 확장 > 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문화의 < 확산 > 과 하나님 나라의 < 확장 > 이죠. 그래서 궁금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사회와 하겠다고하는 소통은 소위 < 이명박적(的) 소통 > 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 것일까요?  (* 소통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내는 일은 아주 중요한데 그런 신학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에게 선한 < 영향을 주는 것 > 에 대한 강조 못지 않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이웃으로부터 < 다양한 영향을 받아야하고 또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 에 대한 < 충분한 강조 > 가 담겨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3.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 문화적 감수성의 개발 > 일까, 아니면 < 바른 결정을 위한 지성의 활용 > 일까?    
■ 아주 넓은 홀에서 열리는 칵테일 파티를 상상해봅니다. 매릴 스트립, 원빈, 기윤실 간사님(^^), 김태희, 대형교회 크리스천, 조선일보 평생독자, 노사모회원, 당신, 나 이렇게 총 9명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9명이 , '문화적 감수성으로 서로 < 만난다 > 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정치적, 사회적으로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이, 문화적 감수성 하나로 < 하나 > 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 하나됨,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요?  

■ < 워낭소리 > 를 보고 이명박 대통령과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랜드나 기륭전자의 경영진과 비정규직 직원들이 < 마더 > 를 보며 동일한 서스펜스를 느낍니다. 노무현의 자살을 비판하는 '교인'과 노무현의 서거를 애도를 슬퍼하는 '교인'이 < 박쥐 > 의 구원론에 공감합니다. 그렇다고 가정해봅니다. 그런 동일한 문화적 감수성으로 인해 , 양측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일까요? 

■ 어떤 이가 나의 생명과 자유를 억누르는 정치적 결정을 내릴 경우, 그가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팬이라는 사실(*문화적 감수성의 확인, 공유의 아주 작은 예)이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우리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추락하는 이 상황에서 문화적 감수성의 확인, 개발, 공유 등에 대한 강조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회피이자 외면이란 생각이 듭니다.  '문화적 감수성의 다름(혹은 부족)'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힘들어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그 다름을 '강제'로 없애려하기 때문입니다. < 박쥐 > 에 대한 평이 아무리 극단적으로 양쪽으로 갈려도,  그 양 집단은 상대쪽이 그런 '호평과 혹평'을 할 '기회'를 막지는 않습니다. (* 2000년 1월 음란폭력성조장매체대책시민협의회는 영화 < 거짓말 > 을 제작한 영화감독 장선우씨와 제작사인 신씨네 대표 신철씨, 단성사 등 전국 1백여개 상영관을 음란물 제작배포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습니다.) 어떤 이가 삶에 대해 진지하고, 타인에 대해 예의를 지킨다면, 그 사람의 스타일나 취향의 고루함 – 그러니까, 감수성의 부족 - 은 그를 향한 저의 < 신뢰 > 여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 영화 < 거짓말 > 에 대해 음대협이나 기윤실이 취한 행동은 문화에 대한 타인의 감수성을 무시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윤실이 이번에 문화선교연구원과 함께 교회가 문화적 감수성을 통해 사회와 만나는 방법을 토론한다고 했을 때 당혹스러웠습니다. 적어도 2000년에 취한 행동에 대한 '사과' 혹은 그 당시 했던 발언에 대한 '철회'가 있은 후에야 이런 토의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전의 그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견지하면서 동시에 문화적 감수성을 통해 사회를 만난다는 것이 제게는 성취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제가 속한 조직이 아닌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저는 기윤실 등 한국의 교회 및 기독운동 단체들이 영화 < 거짓말 > 과 관련한 이전의 주장을 재검토하는 작업을 벌인다면, 그것은 지역사회에 청소년을 위한 복합영상센터를 짓는 것 못지 않은 큰 일이라고 믿습니다.) 

4.  새로운 질문, 새로운 이야기를 찾으며.... 
■ 가끔 '사회'와 < 만나겠다 > 고 하는 우리 말을 '사회'가 들으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절(!)할 수도 있기에 먼저 상대방의 의중을 타진해 보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만남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허락을 받지 않고 장애인을 장애우(友)라고 부르는 것이 장애인에게 실례이듯이, 사회에 물어보지도 않고 사회와 '만나겠다'고, 사회와 '우(友)'하겠다고, 사회와 '통(通)'하겠다고 하는 모습에서 '일방성'을 봅니다.  

■  이 글을 쓰는데 드는 생각인데요,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내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라는 질문으로 바꿔보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소통하려는 대상은 추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람이기에, < 3인칭적인 대안들 >  - 매뉴얼화 할 수 있음 - 이 아니라 < 1인칭적인 경험과 지혜 > - 매뉴얼화 하기 어려움 - 를 나눌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번 포럼 결과를 매뉴얼로 만들어 한국 교회가 공유하게끔 할 것이란 계획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 우리 문제 > 가 매뉴얼로 해결되는 성격의 문제인지, 궁금합니다. )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렇습니다. <교회>가 사회와의 관계를 위해 고민하는 <교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 가장 큰 역할은 (문화관련 매뉴얼 제공이나 문화공간의 제공이 아니라)  '적절한 신학'의 제공이다. 끝.

후기
1) 지금 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제 생각과 주최 측 철학이 참 많이 달랐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이 다른 이를 초청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생각을 나눌 좋은 기회를 준 주최 측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날 발제자와 토론자를 소개하면:
발제 - 임성빈 교수(장신대 기독교와문화, 문화선교연구원장, 기윤실 공동대표)
사회 -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기윤실교회신뢰회복네트워크본부장)
토론 -최은호 목사(예장통합 문화법인 사무국장)
         박상규 목사(분당만나교회 문화사역담당)
         박준용 기획자(청어람 문예아카데미, 한양대 강사)
         신동주 PD(CBS TV국)
2) 상기 포럼이 열리기 한 해 전에 < 2008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 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18.4%인데 반해 '불신한다'는 비율은 무려 48.3%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점수로 환산하면 41점, 학점으로는 'C-'에 해당하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뉴스앤조이 2008.11.19.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