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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2일

위장(胃腸) 비유에 대해


얼마전 제가 녹음했던 '내가 버린책(팟캐스트)'를 듣고, 어느 분이 질문을 하셨어요. 위장 비유가 뭔가요? (그날 시간 관계로 "위장도 한 가지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까지만 말을 했어요. ) 질문해주신 S님께 감사해요.  

위장 비유에 대해.

1.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먹는다. 이를테면 거울이 아니라 위장(胃腸)이다. (...)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충실히 보여주는 위장이 좋은 위장이 아닌 것처럼, 당대적 현실의 세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거울로서의 소설이라는 관념은 끈질기다. (...) ”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지음, p.23). 이 구절을 읽다가 비유로서의 위장을 처음 생각했어요. (신형철 평론가와는 좀 다른 맥락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먹거나 마실 때, 사실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걸 다 확인하지 못하는데 그래도 죽지 않는데 어쩌면 이게 우리는 세계관에 의해 영향받으며 살아간다라는 것에 대한 적절한 묘사가 아닐까 싶어서요. ( , 하나 들어갔다고 죽고 그러지 않음. ) 매번, 우리가 먹는 모든 걸 완벽하게 파악한 뒤에야 먹겠다고 한다면, 우린 먹을 기회를 다 놓치고, 먹을 게 없을 거에요. 그럼, 영양실조. (가끔 너무 허기져서, 자기의 이론적 원칙을 무시하고 슬쩍 집어 먹는 게 있겠죠. 그래서, 그 덕분에 지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구요. 겨우 연명. ) 좋은 것을 가려서 먹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그 좋은 것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묻어 있을 수 있다 (실재), 그래도 우리는 계속 먹고, 그러면서 살아간다. (사실). 즉,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식이요법이다. 철저하게 실천하려하면 굶어죽는다. (결론.)

2. 위장 비유에는 이런 측면도 있어요. 그리스도인의 위 운동과 비기독인의 위 운동은 동일하다. 기독교적으로 소화시킨다, 라는 말은 없다, 라는 것이죠. 이 말은, 기독인에게만 주어진 어떤 특별한 안전장치가 없다는 것. 모든 인식 과정은 모든 이에게, 그리고 모든 주제에서 - 신학이든 물리학이든 - 동일. 근대 과학에서는 예를 들어 데카르트 등 명석, 판명한 것을 믿고, 추구했지만 현대 과학, 인식론에서는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하지 않거든요. 따라서, 명석,판명하게 백퍼센트 기독교적이라고 판명난 사실(세계관)에 근거해서만 세상을 보겠어, 라는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상기 근대주의의 기독교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적절하지 않다고 판명난 것을 따르고 있는 슬픈 운동이어요. 위장 비유에 따르자면, 제자로서의 삶에 어긋나지 않게 기독교적으로만 인식하겠어, 라는 말은 나는 기독교적으로 소화시키겠어, 라는 말처럼 무의미한 말이어요. 균형 잡힌 식단을 짜겠어.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다양한 주장들을 듣고 확인해보겠어.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된다면 고집 피우지 않고 인정하겠어. 이런 말들이 유의미한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제가 팟캐스트에서 소개한 , 제가 둘째 아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 그러니까, 무언가를 기독교적으로 인식하는 데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 밖에 없어, 라고 한 말의 의미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