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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0일

어떤 역자(譯者)

얼마 전에 한스 큉의 이슬람 : 역사 미래 현재를 샀다. 한스 큉이 썼고, 손성현이 번역했다. 이로써 나는 손성현이 번역한 책을 네 권 산 셈이다. 이미 산 책은 역사적 예수(게르트 타이쎈, 아네테 메르츠 공저), 성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열린 성서 학습의 길(게르트 타이쎈 지음), 어린이의 다섯 가지 중대한 질문 : 아이와 나누는 종교적 대화(프리드리히 슈바이처 지음). 마지막 책을 지금 읽고 있는데 참 멋진 말이 등장했다. “종교 교육의 문제는 스스로 정답을 찾지 못한 어른이 아니라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어른, 그래서 어린이의 질문에 귀 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또 그럴 만한 능력도 없는 어른이다. 자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여러 물음과 불확실함 때문에 신앙 교육을 시킬 수 없다는 정서는 신앙을 무조건적인 동의 혹은 아무런 질문도 필요 없는 확신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다. 성서의 관점에서 이해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련의 교리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신앙 고백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이다. 이 관계는 삶의 높이와 깊이를 헤아리는 관계, 확신과 찬양만이 아니라 의심과 탄식이 어우러지는 관계이다.” (어린이의 다섯 가지 중대한 질문,p.119-120). 그런 것 같다. 신학자의 아들이 아니라, 신 앞에서 솔직한 무신론자의 아들이 더 멋진 신앙을 물려 받을 수도 있는 것. 확신에 찬 아버지도 귀하다. 진지하게 의심하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버지도 귀하다. 

이어지는 구절: "이렇게 볼 때 어른들이 느끼는 불확실함과 묻고 또 묻는 자세는 오히려 어린이에게 적합한 종교 교육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다.  "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