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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일

기독교적(的)?기독교적(敵)! (2) - 헬라어

1.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을 때마다, 혹시 가수면 상태의 내 입에서, 평소 꼭꼭 숨겨놓았던 내 은밀한 욕망이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작은 불안에 젖곤 합니다. 전신마취 수술 후 아직 깨어나지 않은 한 노 신학자의 입에선, 성경 구절이 흘러나왔다고 하죠, 그것도 헬라어로. 헬라어가 아니어도 좋으니 성경 몇 구절 제 입에서 새어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요, 제 입에서 <헬라어 단어 하나>가 튀어나오는 기적같은 일이 혹 생긴다면, 그럼 그 단어는 분명 <에피티마오>일 것입니다. 몇 년 째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단어 에피티마오. 질책하다. 심하게 꾸짖다.  

2. 마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한테 크게 ‘에피티마오’ 당합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기독교역사에서 이보다 더 심한 질책을 받은 기독교인이 또 있을까요? 그럼, 베드로가 이렇게 심한 질책을 당한 이유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개역한글, 막 8:32).

 3. ‘간(諫)하다’ 혹은 ‘간언(諫言)하다’는 웃어른이나 임금의 잘못을 지적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극에서 보면 신하는 고개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마를 바닥에 대고 간합니다. 그럼 베드로가 간(諫)하고 있다는 이 장면을 다른 성경들은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개역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새번역).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공동번역개정). 아무리 읽어봐도 이마를 땅에 대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한 영어성경(CEV)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먼저 저의 한국어 의역을, 그리고 이어서 영어 원문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한쪽으로 끌고가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딴 식으로 한 번만 더 말했단 봐라! (Peter took Jesus aside and told him to stop talking like that.) 너 한 번만 또 그딴 식으로 말했다간 다리몽둥이 부러질 줄 알어! 드라마에서 자주 듣습니다. 고난이고 나발이고 아직 왕국도 세워지지 않았는데 죽는다고? 메시아가 죽는다니, 이 양반이 지금 미쳤나! 지금 이 순간의 베드로를 묘사하기 위해 헬라어 성경이 선택한 단어, '에피티마오'입니다. 질책하다. 심하게 꾸짖다. 개역한글 성경은 원문의 뉘앙스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4. 제가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일은 이제부터 벌어집니다. 그렇게 큰 굴욕을 당하고(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심하게 질책당했습니다),그렇게 큰 신학적 오류를 범했으면서도 (메시아는 결코 수난 받아선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제2의 굴욕과 오류를 피해갈 그런 신학적 안전 조치 말이죠. 저 같으면 패닉 상태에 빠져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제가 믿는 모든 걸 다시 점검해볼 것 같습니다. 그런 결정적인 오류를 또 한 번 범하지 않기 위해서요. 마가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적(的)으로만 세상을 보기 위해서요.(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막 8:33). 그런데 이 남자는 이전과 비슷한 삶을 이어갑니다. 나머지 열한 명 동료들 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진심으로 믿고, 그래서 동료들과 최소 두 번 이상 크게 싸우고, 하루는 산에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가지 말고 산 정상에서 살자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닭 우는 소리 듣고 울고, 이방인과 밥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당황해서 도망치고, 그러다가 들켜서 공개 석상에서 '초신자' 바울로부터 왜 그따위로 신앙생활하냐는 질책을 받고, 말년에는 지나가는 남자에게 '쿼바디스'라고 묻고...이 남자의 삶에선 크고 작은 굴욕과 오류와 실수가 떠난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남자 그런 모든 오류와 실수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방법론이나 시스템을 찾지 않습니다. 세우지 않습니다. 그냥 계속 베드로적(的)으로 살아갑니다. 실수하며, 성숙하며.

5. 그때 만약 베드로가, (일반적으로 표현해서) 또 한 번의 신학적 · 신앙적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마가복음적으로 표현해서) 사람적(的)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적(的)으로만 생각하기 위해, (로마서적으로 표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겠다고,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교회에서 유행하고있는 소위 ‘기독교세계관운동’을 벌였다면, 주님은 (제가 모르는 아람어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양반아, 기독교적으로만 보는 확실한 방법을 찾겠다는 그게 더 큰 실수야. 지금처럼 때때로 잘못 저지르며 성숙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저는 <이 양반아>라고 말씀하실 때의 주님의 온화하신 눈길과 음성을 묘사할 헬라어,아람어,한국어를 모릅니다.

2012.3.22.

*예, 맞습니다. 이 글은 세상을 <비기독교적으로는 결코 안 보려는, 다시 말해, 기독교적으로만 보는 방법>을 찾으려는 소위 <기독교세계관운동>에 대한 짧은 <디스>입니다. 좀 <긴 디스>는 여기서. https://holyfat.blogspot.com/2013/05/blog-post_20.html#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