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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일

2. 당신의 1제곱인치(inch²)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1. 서정주가 < 자화상 > 을 썼던 해로부터 정확하게 백 년 전, 네덜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가 태어납니다. 그는 25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26세에 목사가 됩니다. 32세에는 반혁명당(ARP)의 총재가 되고, 37세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43세에는 자유대학교를 설립했고 64세에는 네덜란드의 수상이 됩니다. 30대 초반부터 주간지 헤라우트(De Heraut)와 일간지 스탠더드(De Standaard)의 편집인과 주필로 45년에 걸쳐 칼럼을 썼고 평생 저술한 책이 총 223권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자’라고 불렀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정부는 카이퍼의 70회 생일을 국경일로 선포합니다.

2. 카이퍼는 44세에 자신이 세운 ‘자유대학교’(Free Univirsity)의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취임기념 강연을 하는데요, 여기엔 미당이 < 자화상 > 에서 사용한 ‘팔 할’ 못지않은 심히 계량적(計量的)인 언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1제곱인치’(inch²)라는 용어인데요, 지금도 여전히 전세계 기독교계에서 널리 회자·인용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그 분이 '그 곳도 내꺼야!'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곳은 없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그 어디에도. 단 1제곱인치도 없다! " 무척 선동적(어떤 이에게는 감동적)입니다. 인본주의와 모더니즘에 물든 영역을 단 1제곱인치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우리 삶을 완벽하게 ‘십 할’ 기독교화하겠다는 카이퍼의 이 신학을 저는 < 면적의 신학 > 이라고 부르겠습니다.

3. 모든 면(적)에 따라붙는 필연적인 사실 하나는 < 경계 >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발 딛고 서있는 면이 < 기독교적 > 이라면, 그 면(적)이 끝나는 곳에선 필연적으로 < 비기독교적 > 인 게 시작됩니다. 그게 면적의 운명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비기독교적인 것은 단 1제곱인치도 남기지 않으려는 자에게 비기독교적 면적은 잘라내버리거나 정복해야 할 면적일 뿐입니다. < 면적의 신학 > 신봉자들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 정밀한 자 > 와 < 날카로운 칼 > 이라는 두 개의 교리를 만들어냅니다. 정확하게 기독교/비기독교의 경계선을 찾은 다음, 가차 없이 잘라냅니다. 비기독교를. 기독교만 남겨둔채.

4. “그런데 말이죠” 그래서 제가 카이퍼에게 묻습니다, “우리 인생사에는 모호한 부분이 많은데 명확한 경계를 찾는다는 게 가능할까요? 기독교와 비기독교가 갈라지는 경계선이 정확하게 여기다, 이럴 수 있는 걸까요?” 카이퍼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합니다. “[기독교인은] 인생의 지도에서 이웃과 전혀 다르게 선을 긋는 법입니다.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고 그 기원에는 공통점이 전혀없습니다. 당신이 그은 경계선 라인 왼쪽에 서 있는 사람과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의 관점은 겹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택하든지 저것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 내부에서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이 혹 있다면] 우리의 대열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 제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카이퍼씨, 우리가 어떻게 1인치 수준까지 정확하게 그런 경계를 파악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카이퍼가 또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성경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 그 경계 사이의 선을 봅니다.” (이상 카이퍼의 모든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1880년의 취임기념 강연 (Sphere Sovereignty)과 189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고 행한 강연의 모음집 (Lectures on Calvinism)에서 발췌.)

5. 그런데 우리 삶은 과연 < 면적 > 을 닮았을까요? 항상 명확한 경계가 있고, 그 경계선을 콕 집어낼 수 있는. 무표정이 웃음으로 변하는 그 정확한 경계를 누가 집어낼 수 있을까요? 화가 나 뾰로통해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피어나는 순간을. 제가 던진 조크에 터진 K의 웃음. 그 웃음의 시작과 끝, K 본인이라고 알 수 있을까요? 간지러움이 성적 쾌감으로 변하는 지점, 단순한 살과 성감대의 경계선은? 아니, 제 호감은 언제부터 사랑이 되었을까요? 사실 경계의 불명료성은 삶의 모든 ‘영역’(sphere) - 네, 카이퍼가 주창한 개념인데요, 제가 그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습니다 –에서 발견됩니다. 고종석이 『감염된 언어』에서 하는 말을 들어볼까요? “이른바 로만어라는 것은 통속 라틴어가 진화한 언어들이라고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러나 통속 라틴어의 끝과 예컨대 이탈리아어의 시작이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누구도 확정할 수 없다.” 라틴어 얘기를 들었으니 이번엔 그리스어 얘기를 한 번 들어봅니다. 영문학 교수이자 기독교작가였던 C. S. 루이스는 그리스어로 된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선 먼저 그리스어문법 공부라는 지루하고 고역스러운 시간을 거쳐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고역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날짜와 시간을 정확하게 집어낼 수 없습니다.” (『영광의 무게』중에서). 한편 루이스는 또 다른 책에서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경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상은 100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략) 다른 종교를 믿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영향을 받아 자기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에만 집중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중에서) 고종석과 C. S. 루이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런 신학과 이데올로기를 저는 < 비면적 > 적 신학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겠습니다. 비면적적 신학에선 일견 비기독교적이라고 보이는 것 속에서도 기독교를 발견합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플먼트
1) 1제곱인치 같은 < 면적 > 은유를 갖고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는 건 적절할까? “어거스틴 이래 중세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나라’(basileia)를 영토, 구조, 제도, 혹은 기구와 같은 어떤 지정학적 실재로 이해했다. 그러나 구스타프 달만(Gustaf Dalman, 1855~1941)이 그리스어 ‘바실레이아’의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말쿠스’(malkuth)가 야훼와 결합하여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God's kingly rule)를 의미한다고 밝힌 이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실레이아’를 더 이상 영토적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장윤재,‘예수 믿기, 예수 살기-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기독교사상』,2007년 3월호에서 인용) 만약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적절한 개념이 ‘면적’이 아니라 ‘통치’라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달라진다. “어디서부터 자를까요?”가 전자에 어울리는 질문이라면, “하나님, 당신은 어떻게 저런 사람을 기다려주고 계신 건가요?”는 후자와 맞닿아 있다. ‘면적’은 완전한 정복(인식)이 가능하되, ‘통치’는 영원히 부분적으로만 이해 가능할 뿐이다.
2) 1988년 10월 종로 5가에 위치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 아브라함 카이퍼박사 자료전시회 > 가 열렸다. 주한 네덜란드 대사 텡베르컨, 과거 화란 자유대학에서 유학했던 손봉호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 전시회를 주최했던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의 정성구 원장은 2010년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과 삶』(킹덤북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상기 강연에 대한 번역 오류였는데 그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실 수 없는 땅은 단 한 평도 없다.(p.270)” 한 평은 3제곱미터(㎡)가 넘기에 1제곱인치라는 말을 통해 카이퍼가 전하고자 했던 뉘앙스를 전혀 살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단 한 평도 없다”라는 이 번역은 “단 1헥타르(1만㎡)도 없다”라는 번역 만큼이나 카이퍼에서 멀다. 그렇다면 카이퍼의 의도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반대 극단으로 가는 건 어떨까? 예를들어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1제곱옹스트롬(1억분의 1센티미터)도 없다”와 같은 의역. 궁금해진다, 그 < 1제곱옹스트롬 기독교 > 는 < 1제곱밀리미터 기독교 > 보다 더 순전한 기독교를 보여주게 되는 걸까? 아무리 작아도 1제곱옹스트롬도 여전히 < 면적 > 일찐대, 여전히 낮에는 자와 칼의 교리가 지배하고 밤에는 < 잘라내라! > 라는 나직한 계시의 목소리가 온 지면 위를 뒤덮고 있으리라. 1제곱옹스트롬이나 되는 그 < 널따란 > 지면 위를.
3) 카이퍼식 사랑을 나누는 자는 ‘클리토리스는 어디에 붙어있나?’ 라고 묻는다. 클리토리스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 폭과 길이와 경계를 묻는다. 배꼽에서 1센티미터씩 기계적으로 내려오는 그런 여행. 클리토리스와 유륜(乳輪) 경계 밖으론 1센티미터도 벗어나지 않는, 1센티미터라도 벗어난 곳엔 절정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그런 카이퍼식 여행. 이 사랑법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다다르고자하는(혹은 인도하고자하는) ‘또 다른 천국’ 역시 ‘지리학적인 실재’가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떻게 만져(통치)주는가와 연관된 지극히 ‘관계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따라 그 어떤 곳도 천국으로 이어질 수 있고, 같은 이유에서 클리토리스조차 그저 하나의 삭막한, 막다른 골목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폴리처상 수상작가 나탈리 앤지어의 『여자:그 내밀한 지리학』(Woman:An Intimate Geography). 만약 그녀가 여성의 몸 전반이 아니라 섹스에 한정해서 이 책을 썼다면 분명 그 제목을 바꿨으리라. 여자, 그 내밀한 통치(reign). 혹은 그 내밀한 정치(politics).
4) "만져줘. 아니, 거기 말고, 조금 더 위" 내 귀에도 지금 내 목소리는 달짝지근하게 들린다. "조금만 더 위. 응, 그래, 바로 거기!!! " 이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입술을 열면 부끄러운 신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황급히 손을 가져다 입에 문다. 그러나 오늘도 성공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눌 때 마다 나는 매번 ‘감미로운 실패’를 경험한다. “돌아누워”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명령, 부끄러움과 기대감에 내 온 몸은 달아오른다. 난 눈을 질끈 감은채 한껏 달궈진 내 엉덩이를 높이 쳐든다. 철썩! 남자의 손에 들린 자가 내 엉덩이를 때린다.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 내가 처음 들어보는 낯선 내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엉덩이에 피어오른 진홍빛 자국은 묵직한 쾌락과 함께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온 몸으로 퍼져 내 뺨까지 붉게 물들인다. 자가 남긴 장밋빛 흔적이 끝나는 경계선을 정확하게 집어낼 자 누구일까. 내 신음이 잦아드는 순간과 수치심과 쾌락의 경계선을. 내 엉덩이는 애타게 또 한 번 자의 하강을 기다린다. 언젠가 한 신칼빈주의자의 손에 들려 내 몸을,내 생각을, 내 신념을 쟀던 자. 그 (자)에게 길들여져 어느 순간 나 또한 하나의 자가 되어 세상과 타인과 나를 쟀다. 그 자가 이제 < 그(분) > 의 손에 들려, 그(분)의 통치하에 하강하고, 내 입에선 또 다시 길고 감미로운 신음. 어느새 내 얼굴에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 쾌락과 치유의 눈물.  
20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