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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일

5. 당신의 육체적 반응

1. 호산나라는 기독교 포털에서 < 거짓말을 배우는 곳 > 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장정일이 『내게 거짓말을 해봐』 (1996)를 썼고, 장선우가 < 거짓말 > (1999)을 찍어 우리 사회가 한창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제가 올리던 글의 키워드는 ‘기독교’, ‘몸’, ‘섹스’ , ‘영성’ 이렇게 네 가지였는데 세번 째 키워드 때문에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어느날 < 장선우 변주곡 > (연출: 토니 레인즈)을 만드는 제작진이 제게 인터뷰를 요청해왔습니다. 토니 레인즈는 그 다큐멘터리에서 길거리에 장선우 영화의 포스터를 붙이던 사람들까지 인터뷰를 했다고 하니 (전 그 작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인터뷰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 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촬영 인터뷰는 거절했지만 (필명 사용 이유와 동일), 메일을 통한 인터뷰는 수락했고, 제가 받은 질문과 제가 보낸 답신을 차례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2. < 질문 > . “이번에 대법원이 ‘문학성 내지 예술성은 음란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 2000.10.27, 선고, 98도679, 판결) 라고 하면서 내린 ‘거짓말 음란 유죄 판결’에 대해 특히 개신교도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 답신 > . “사적인 경험 하나를 소개하며 답변을 시작할까 합니다. 이번에 대법원에서 음란하다고 판정을 내린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몇 년 전에 읽었습니다. 노골적인 성묘사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소설을 읽을 때 제 몸에서 일어났던 < 육체적인 반응 > 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저의 그 육체적 반응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 책을 읽고 저는 < 울었습니다 > . 그렇습니다. 저는 < 발기 > 를 경험한 게 아니라 < 눈물 > 을 경험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그 책을 다 읽었는데, 너댓시간에 이르는 그 긴 시간 동안 제 성기는 < 단 한 번도 > 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책은 제게 자극적인 책이 아니라 슬픈 책이었기 때문이죠. 지금도 제가 흘렸던, 끈적끈적하지 않고 맑았던 눈물을 기억합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 책을 읽을 때는 발기하는 게 정상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음란’의 목표는 발기입니다). 발기를 할 때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고, 발기만이 이 책의 목표라고 말합니다. 저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 소설을 읽으며 발기를 경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기가 발기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성기도 반드시 발기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내가 경험하는 것 외의 다른 차원의 삶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척 무례한 생각입니다. 이번 고발과 이번 판결이 그랬습니다. 개신교도 입장에서 이번 판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쭤보셨는데, 저는 ‘종교’라는 변수는 이번 사태에서 부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일반인’ 대 ‘종교인’이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반인과 종교인’ 대 ‘그러지 않은 일반인과 종교인’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 여러 가지 ‘확신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기에, 지금 ‘확신’을 갖고 반대 운동을 하는 음대협과 기윤실을 경멸하지 못합니다. 제가 만약 그들을 경멸한다면 그건 ‘과거의 나’ 를 경멸하는 셈이 되고, 더 나아가 현재의 나를 부인하는 일이 될테니까요. 기윤실과 음대협의 논리에 반대 의견을 펼칠 때 저는 항상 ‘과거의 나’를 향해 글을 쓴다는 마음이 듭니다. 남들은 모르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던 과거의 제 모습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습니다. 현재 몇몇 기독단체의 행동에 대해서도 개신교인의 한사람으로서 몹시 부끄럽습니다.

2012.6.21.
신동주

서플먼트

1) 장정일(소설)과 장선우(영화) 사태의 차이점 중 하나는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 달리 영화 < 거짓말 > 은 기소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0년 6월 30일 검찰은 음대협이 고발한 < 거짓말 > 의 장선우 감독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고, 2001년 4월11일 서울고검 역시 음대협의 항고를 기각했다. 한편 장정일은 대법의 상기 유죄 판결에 대해 “사법적인 판결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유죄 판결이 났지만 유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은 작가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함. (연합뉴스, 2000.10.27.)

2) 두 작품과 관련해 저자/감독과 독자/관객의 설명과 평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면 이렇다. 장정일, “[이번 소설은] 지금까지 내가 써온 소설들의 주제가 ‘자기 모멸’이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작품이며, 따라서 이 소설은 ‘성’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 < 시사저널 > 인터뷰, 1996.11.21.) 이인화 교수, “음란성이 문제시 되는 경우 그 표현의 음란 여부를 떠나 거울처럼 자기를 비춰봄으로써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위 소설의 성애묘사는 스스로 성을 통한 자기모멸을 시도함으로써 경쟁사회로부터 면책과 휴식을 꿈꾸는 한 인간의 심리적 정황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예술장르로서의 소설에 속한다.” (강금실 변호사가 항소심에서 제출한 사실조회회신의 내용 일부. 『대한변협 1997년도 인권보고서』 중 ‘음란물 단속과 표현의 자유 (강금실)’의 각주 46번에서 인용.) 같은 각주에 등장하는 황현산 교수의 사실조회회신을 아울러 소개하면:  “[모든 소설은] 성실한 문학과 불성실한 문학으로 구분된다. 사회적으로 익숙한 사고방식과 기성논리에 의존하여 일반적 통념을 반성없이 되풀이함으로써 독자에게 영합하는 문학은 불성실한 문학이며,인간의 내적 외적 생활에 있어 사회적으로 은폐되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사실들을 들추어내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책에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언술체계를 만들어내려는 문학은 성실한 문학이다. 위 소설은 성실한 문학이다”. 장선우,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웃기고 지루하고 슬픈 영화이다” ( 1999.9.5. 베니스영화제 공식 기자회견 인터뷰. < 키노 > ,1999.10.에서 인용). 권장희 음대협 총무, “이미 원작 소설이 음란물 판정을 받아 작가가 실형을 산 문제작을 18억원이라는 자본을 들여 제작한 상업적 의도가 문제가 된다” (2000.2.10. 흥사단에서 열린 시민단체와의 합동토론회 중 발언). 영화사 ‘신씨네’ 대표 신철, “사실 장정일에 대해서는 그 전부터 계속 관심이 있었다. 89년 그가 처음 낸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굉장히 좋게 본 기억이 있는데 (중략) 무엇보다도 장정일의 소설에는 독재 시대를 겪어오면서 억눌려 있던 표현들, 그 정신병적인 징후들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건 참 시의적절한 이야기가 아닌가? ”( < 키노 > 와의 인터뷰. 일시 불명확.) 영화평론가 김영진, “거리낌없이 정면에서 남녀의 벌거벗은 육체를 보는 것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참담한 외설을 느끼게 한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매질로 드러나는 가학,피학성도 문맥상 이 땅의 ‘체벌문화’에 대한 비유로 읽히며, 그 희극성으로 인해 처연한 슬픔마저 자아낸다. 가장 큰 논란거리일 미성년자라는 설정도 성에 눈뜸을 통한 성장 모티브로 이해한다면 수용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신동아 1999.11. < 감독 장선우, 배우 이상현, 교수 이주향의 영화 ’거짓말‘이야기 > 에서 재인용). 바티칸 문화담당 위원 루카 펠레그리니 신부, "거짓말은 노골적인 누드와 정사 장면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관점과 비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선정주의에 기울어져 있으며 의미가 결여돼 있다." ( < 키노 > , 1999년 10월호에서 인용). 신국원 음대협 정책위원장, “바티칸의 비난처럼 이 영화는 그 노골적인 누드와 정사장면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관점과 희망의 비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이다. 일반 관객은 예술적인 장치의 영향을 받기 보다는, 이런 허무적 시각과 함께 성적 자극과 도덕적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흥사단에서 열린 시민단체와의 합동토론회에서 발제한 < 영화 ‘거짓말’로 보는 한국 영화(또는 대중문화) 현실의 문제점과 대책” 중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런 류의 평을 접할 때면 나는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덕적 관점과 희망의 비전이 부족하면 구속돼야 하나?” 그리고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평이 나온다! 알레르토 바베라 베니스 영화제 집행위원장, "경쟁적인 소비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거짓말은 모욕을 주는 꿈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무례한 꿈이 흥미롭다.” ( < 키노 > ,1999.10.에서 인용 )

3) 일견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영화 < 거짓말 > 의 성격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건 이 영화가 <지루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반복되는 정사 장면이 지루했던지 도중에 극장을 빠져나가는 관객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칼럼니스트 지암파올로 피올리는 ‘촬영기법이나 편집이 평범하긴 하지만 섹스가 지루한 일이라는 감독의 의도는 잘 전달된 것 같다’고 평했다” (베니스영화제를 취재한 동아일보 김희경 기자의 기사를 상기 < 신동아 > 기사에서 재인용). 이 영화의 지루함은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음대협 신국원 교수도 인정. “이 영화는 전체의 70% 이상이 성교장면으로 되어 있다. 워낙 성교 장면이 많아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감독은 그것을 의도했다고 한다.” (흥사단에서 열린 상기 합동토론회 발제문). 그래서 궁금해진다. “감독의 의도”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루한”(신국원), “참담한”(김영진), “모욕적인”(알레르토 바베라), “처연한”(전찬일), “슬프고”(장선우), “자기 모멸적인”(장정일) 이 영화를 보며 흥분을 느껴 <자위>가 가능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영화를 보며 자위를 하는 사람이라면 < 천국보다 낯선 > 이나 < 제7의 봉인 > 을 보면서도 사정에 이를 수 있으리라. 

4)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놓고 음란하다고 시비를 걸었던 단체가 ‘음란폭력성 조장매체 대책시민협의회’였다면, 1920년 10월 뉴욕의 문예지 < 리틀 리뷰 > 에 연재 중이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외설스럽다고 고소했던 단체는 ‘뉴욕죄악억제회(New York Society for the Suppression of Vice)’였다. 연재는 중단됐고 지루한 재판이 시작됐다. 나는 지금 ‘뉴욕죄악억제회’에 감사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재판은 열리지 않았을테고,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면 미국 문학사 및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기념비적인 판결문으로 여겨지는 죤 M. 울시 판사의 다음과 같은 해금(解禁) 판결 결정문을 읽어 볼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판결문에 나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불결하다고 비난 받는 단어들은 거의 모든 남자들에게, 그리고 본인이 감히 말하거니와 많은 여자들에게도 오랫동안 알려진 옛 색슨족의 말들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본인이 믿기에, 조이스가 서술하고자 추구하고 있는 유형의 사람들의 육체적 및 정신적 삶 속에서 자연스럽고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의 마음 속에서 섹스라는 주제가 거듭해서 출현한다는 사실과 맞부딪힐 때 우리는, 그 무대가 켈트지방이고 그 계절은 봄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it must always be remembered that his locale was Celtic and his season spring.)” (1933.12.6. 미국 지방법원 뉴욕 남부지청 죤 M. 울시 판사의 ‘해금 판결문’ 중에서. 1차적으로는 김종건의 2007년판 『율리시스』 번역본 부록 6번에 실려있는 ‘울시 판사의 해금 판결문’을 참고했으나 문장이 자연스럽지 못해 죤 M. 울시 판사의 판결 원문(http://scholar.google.com/scholar_case?case=5544515174778878625&q=)을 찾아 개인적으로 번역했다). 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한 번 더 읽는다. < 봄임을 기억해야 한다. > 몇 번을 읽어도 믿기지 않는다, 이게 법을 다루는 판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봄에는 허락된다, 모든 것이. 봄에는 한다, 켈트족 남녀 뿐만 아니라, 동이(東夷)족 남녀들도 봄에는, ‘봄’에는!  "조이스가 사용하는 이러한 기법을 우리가 즐기느냐 않느냐는 각자의 취향의 문제이다. (중략) 본인은 『율리시스』가 성실하고 정직한 책이라 주장한다”(존 M. 울시). 자신에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봄’을 ‘겨울’처럼 묘사한다면 그건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일이다. <봄을 겨울처럼> 묘사하라고 강제하거나, <봄을 봄으로> 묘사하는 걸 금지한다면 그건 월권이다.  판결 이듬해 1934년 미국 랜덤하우스, 『율리시스』 출간. 랜덤하우스, 출간되는 모든 『율리시스』 에 죤 M. 울시 판사의 1933년 ‘해금 판결문’ 실음. 그리하여 상기 판결문, 이 세상에서 대중에게 제일 많이 노출된 법정 판결문으로 등극. 나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장정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고, 반성 하지 않는다며 법정 구속한 서울지법 김형진 판사에게, 한 사람의 <작품 그러니까 곧 그의 삶>을 음란하다 판정하여 폐기·절판되도록 만든 한국의 몇몇 크리스천들에게, <봄>이란 그저 달력의 날짜에 불과했던 것이었구나. 제기랄, 봄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회, 봄을 담아낼 줄 모르는 기독교세계관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