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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4일

H형제 살인사건

1. 한 일본 추리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이 기억납니다.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술집의 < 출입문만 만진다 > 는 원칙을 6개월 동안 지킨 남자입니다. 컵도 만지지 않고, 테이블도 만지지 않고 문 손잡이만 만지던 그 남자는 어느 날 살인을 하고, < 문 손잡이에만 남았을 그의 모든 지문 > 을 닦은 뒤, 유유히 사건 현장을 벗어납니다. 결국 경찰은 사건 당일 사라진 남자가 한명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그의 신원은 파악하는데는 실패합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집니다.
2. 제 생각에 그 남자의 생활이 무척 불편했을 것 같습니다. 우연히 테이블에 손을 짚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아는) 남자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을 것입니다. 컵을 만지지 않기 위해 회사(술집)에서 그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을 확률이 큽니다. 완전범죄를 노렸던 그 남자는 < 자신의 손이 닿는 곳 > 을 항상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저도 끊임없이 < 의식 > 하며 지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쓰는 < 형제 > 라는 호칭입니다. 저는 최근 10여년간 이 형제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 단 한번 > 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늘,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한국교회의 의식(과 무의식)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3. 누군가 저를 < 형제(님) >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 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 분이 믿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방금 말한 그 가르침은 윤리 혹은 영적 사실에 대한 가르침이지 호칭에 관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 가르침은 < 그런 태도를 갖춰라 > < 그렇게 대우해라 > 에 대한 것이지, < 그렇게 불러라 > 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가르침을 후자로 해석,실천하는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번지수를 잘못찾은 신학일 것입니다.
4. 한국어의 특징 중의 하나는 2인칭 대명사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대화 상대에 대한 마땅한 호칭을 찾지못해 곤혹스러워 하거나, 상대가 사용한 (나에 대한 적당하지 않은) 호칭에 불쾌해지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소설가 고종석은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 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는 언어"라고 말을 합니다. 상대와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가 일견 평등과 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제님'이라는 용어에 유혹을 느끼는 것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곤혹스러움을 일시에 해소해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이런 복잡한 한국 사회의 호칭체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처음 본(혹은 자주 보는) 사람을 형제로 < 대우하며 사는 것 > 과, 누구가를 형제님이라고 < 부르며 지내는 것 > 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이렇게 물어보면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 전자와 후자, 둘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 . 물론 후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후자가 전자와 < 아무런 연관성 없이 > 실천될 수도 있다 는 점입니다. 아무런 상관없이. 참 무서운 말입니다. 교회 내부에서의 빈부 차이, 교회 안과 교회 밖의 빈부 차이를 그대로 놓아둔 < 채로도 > 우린 형제님! 하며 반가와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을 일개 호칭에 대한 가르침으로 '전락'시킨다면 심히 안타까운 일이며, 동시에 직무 유기일 것입니다.
5. "아니, 웬일이요?"하고 주교는 장발장을 향해 외쳤다. [...] "나는 당신에게 촛대도 주었는데 [...] 왜 당신에게 준 그릇이랑 함께 가져가지 않으셨소?" 장발장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인간의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 거룩한 주교를 바라보았다.[...] "나를 정말 풀어주는 겁니까?" 장발장은 물러서면서 마치 꿈꾸듯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당신에게 주었던 촛대가 여기 있으니 갖고 가시오." [...] 장발장은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다만 기계적으로 그 두 개의 촛대를 받았다. [...] 장발장은 금방 실신할 것 같았다. 주교는 그에게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형제인> 장발장이여, 당신은 이제 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선에 사는 것이오" ( 『레미제라블』 제1권 중에서. < > 표는 신피디).
위의 장면은 아마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장발쟝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읽다보니 < 장발쟝이 와들와들 떨 > 었던 것은 주교가 장발쟝을 형제라고 부르기 전이라는 사실이 눈에 띄었습니다. 형제라고 < 불리워 > 와들와들 떨었던 것이 아니고, 형제(즉, 사람으)로 < 대우 > 를 받았기에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 대우 > 와 < 호칭 > 은 별개의 것입니다. (1)후자가 전자와 함께 있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2) 전자는 후자 없이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3)전자없이 후자만 있는 것은 불행입니다.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최근에 내가 장발쟝처럼 와들와들 떨린 적이 있었나? < 넘쳐나는 형제(님) 호칭 > 에 < 처음 보는 사람도 그 분 안에서 형제라는 신비 > 가 가리는 것 같습니다.
6. 제가 볼 때, 우리 한국교회가 형제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데에는 편리성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경건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을 믿고 이제 그 분 앞에서 경건해지고 싶은데 막상 삶이 삶이 경건해지거나 신령해지지 않자, 사람들이 쉬운 방법을 택한 것 같습니다. < 용어의 경건화 >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용어의 종교화 > 라고 해도 되고요. 경건한 삶은 살지 못해도 경건한 용어만은 쓴다는 뜻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 인본주의적 > 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 빨갱이 > 라는 단어가 받아왔던 식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자신 안에 남아있는 소위 인본주의적 생각,세계관을 없애려고 많은/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과거와는 다른 실재,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 다른 이에게/자기 자신에게 > 확인시키려고 < 과거와는 다른 용어 > 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 의식하면서 혹은 무의식 가운데 > 받아들이는 종교적인 용어 중에 형제라는 호칭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7. 아이로니 하나. 형제 사이가 될 때, 우리는 말을 놓습니다. 형제 사이의 가장 큰 특징은 더 이상 서로를 형제님이라고 호칭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내가 사랑해서 형제로 대우하던 사람이 어느 날 저를 < 형제님이라고 부른다면 > 저는 모욕을 느끼거나 깊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8. 아이로니 둘. 이 형제라는 호칭은 보기와는 달리,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평등한, 수평적 관계를 상징하는 단어로 여겨지는 이 '형제(님)' 이라는 용어는, 사실 무척 < 서열적 > 입니다. 교회 식당에서 박성호라는 (가상의) 목회자를 만났을 때, 그를 보고 < 박성호 목사님! > 이라고 부르는 대신 < 박성호 형제님! > 이라고 해보십시오. 아마 그 < 형제님 > 의 얼굴색은 변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전도사/부목/장로/집사 모두에게 해당되는 예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 < 형제님 > 이라는 호칭에 모욕을 느낄수 있다는 사실은, <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한 형제자매다 > 라는 이 고귀한(priceless) 명제가 사실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실제로는 얼마에 거래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결코 < 목사님 > < 전도사님 > < 장로님 > < 집사님 > (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 형제님 > 을 사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에서 < 형제님 > 은 덤핑 판매되는 품목입니다.
9. 형제라는 호칭에 관한 제 글을 마무리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어법에 맞고, 우리 한국교회 특유의 심리적/신학적 강박증을 걷어낸, 또 '정치적으로도 올바른(즉,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그런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론 < 000 선생님 > 이 괜찮을 것 같은데, 물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두 종류의 글을 소개하며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는, 한 신문사와 한 국어관련 연구단체에 메일로 질문한 내용의 답변인데, 형제라는 호칭이 국어학적으로 적절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장발장이 < 그날 밤 > 주교 집을 나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묘사입니다.
10. (한 신문사의 교열부에서 받은 답변)
국어사전들을 보면, 형제: ①1.형과 아우. ②=동기. ③(종교) 하느님 백성으로서 ‘한자손’이란 뜻으로 일컫는 말. ④(천주) 평교간에 또는 나이가 아래인 남자 교우를 부를 때 쓰는 말. 서~ . 베드로∼. 이런 정도의 풀이는 대체로 1950년대 이후 나온 국어사전들에서 대동소이 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톨릭)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형제, 자매 호칭은 두루 통하여 쓰이는 듯합니다 [....] 신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보고 들을 때 그것이 맞갖지 않고, 이로써 그 동아리나 집단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합니다.
11. (한 국어관련 연구단체로부터 받은 답변)
'형제님'이 어법에 맞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참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왠고 하니 일반 사회에서는 '형제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따라서 일반 사회에서는 '형제님'은 어법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교인들 사회에서는 이런 말은 거부감 없이 널리 쓰여 왔고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결국 기준이 문제라고 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옳지 않은 말이고 교인들 사이라는 특수 사회에서는 옳은 말입니다. 결국, 교인들 사이에서는 쓸 수 있되, 일반 사회에서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일반 사회에서 쓰일 수 없는 말이라면 교인들 사이에서도 써서는 안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그럴 경우 대신 뭐라고 써야 할지를 묻는다면 답이 어려울 듯싶습니다.
12. 빅토르 위고에 따르자면 그날 밤 장발장은 < 도망치듯 거리에서 빠져나갔다 > 고 합니다. < 급한 걸음으로 들판을 가로질 > 렀으며, <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방황했으나 배도 고프지 않았다 > 고 합니다. 장발쟝은 < 스스로 분노 같은 것을 느꼈 > 는데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뚜렷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 자신이 감동한 것인지, 또는 모욕을 당한 것인지 > 스스로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감옥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했던 < 그 어떤 유들유들한 침착성이 자기의 마음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불안을 느꼈다 > 고 빅토르 위고는 묘사합니다. 무엇이 장발장의 마음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을까요. < 형제님이라는 호칭 > 때문이었을까요.
신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