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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일

3. 당신의 수술

1. “간단한 수술이야.” 마스크를 쓴 의사 K가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저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습니다. 수술용 무영등(無影燈)이 제 얼굴로 쏟아집니다. 그림자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조명. 음영이 전혀 없는 제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요. 낯설고 섬뜩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 간호사가 제 머리를 밀었고 요도에는 소변관을 끼웠습니다. 마취의가 K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펌프의 계기판 앞으로 다가섭니다. 마취를 시작하나 봅니다. 프로포폴(propofol). K의 설명에 따르면 투여 후 대사속도가 빨라서 최근에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전신마취용 정맥 주사제입니다. 수술용 마킹펜을 든 K가 익숙한 동작으로 제 몸에 선을 하나 긋습니다. “정확하게 인본주의만 잘라줄게.” 그의 동작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잠깐만요! 지금 인본주의와 기독교의 경계를 마크한 라인의 폭, 거의 5밀리미터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펜으로 마크를 해놓으면 나중에 메스로 라인 정중앙을 어떻게 자르겠다는 것일까요. 자르면 안 되는 기독교쪽으로 1밀리미터 침범하면 어떡하죠. 갑자기 불안이 엄습하며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펜을 바꿔줘” K는 두 번째 선을 긋습니다. 제 말을 못들은 걸까요? “더 가는 펜으로 다시 그어달라니까!” 어떻게 비명에 가까운 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거죠? 아니, 제 소리가 정말 입 밖으로 나오긴 한 걸까요?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집니다. K가 간호사로부터 메스를 건네 받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게 저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왔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저를 보면 “수술이 잘 돼서 다행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수술 하루만에 가스도 나왔고, 식사도 잘 하고, 간호사들과 농담도 주고 받습니다. 기분도 아주 좋습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제가 무슨 수술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정도 입니다. 하지만 병명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지금 제 기분이 이렇게 좋으면 됐지요.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독서를 합니다. 일요일 오후의 입원 병동은 너무 조용해서 제가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온 병실에 크게 울릴 정도입니다. 지금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있습니다. 똑! 그런데 이게 뭐죠? 책 위로 뭔가가 떨어집니다. 잘 보니 물방울입니다. 오래된 병원이라 천장이 새나 봅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살펴봅니다. 이상하네요. 하얀 페인트 칠한 천장에는 아무런 얼룩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똑! 또 한 방울의 물이 펼쳐 읽고 있는 책 위로 떨어졌습니다. 제 얼굴을 한번 만져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제 뺨이 흠뻑 젖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이렇게 화창한 오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는데 눈물이라뇨. 더군다나 지금은 포셔가 샤일록에게 한 방 먹이는 통쾌한 장면인데 말이죠. “계약대로 살덩이 일 파운드는 가져가세요. 그러나 그걸 잘라 낼 때 이 기독교인의 피를 한 방울만 흘려도 당신 땅과 재물은 국법에 따라 베니스 정부로 몰수될 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슬플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이 승리의 장면을 읽는데 왜 제 눈에서 눈물이 흘렀는지. 저는 잠시 책을 덮고 창 밖 화단을 바라봅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화단을 내리쬐고 있습니다. 


서플먼트

1) 상기 포셔의 대사를 소개함에 있어서 최종철이 번역한 『베니스의 상인』(민음사,2010)을 참고하였으되 화자의 어투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었고 단어 두 개를 뺐다. 

2)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베어내는 일은 실제 가능한 일일까. “대동맥으로부터 실핏줄에 이르는 혈관은 (중략) 아주 좁아져서 혈구들이 한 줄로 미끄러져 들어가야 할 정도가 될 때까지 갈라지고 또 갈라진다. (중략) 그리하여 대부분의 세포 조직에서 어떤 세포도 혈관으로부터 셋 또는 네 세포 이상 떨어져있지 않[게 된다]. (중략) [그렇기에] 피를 흘리지 않고는 1파운드의 살을 떼어내기는커녕 1밀리그램의 살도 떼어 낼 수 없다. 프랙탈 기하학의 창시자 베노이트 만델브로트는 이것을 베니스의 상인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였다.” (제임스 글리크, 『카오스, 현대과학의 대혁명』 , 동문사,1993, pp.141-142에서 인용하였으되 마지막 두 문장의 순서 바꾸었고, ‘프랙탈 기하학의 창시자’라는 문구 삽입.)

3) 우리가 만약 ‘필요 없고 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을 모두 잘라내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장자의 대답은 이렇다. “쓸모 없음을 알아야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지. 땅은 한 없이 넓지만 사람에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는 만큼일세.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모두 황천에 이르기까지 다 파 없애면 [이제 남은 그 깍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같은 땅이] 그래도 정말 쓸모 있는 것일 수 있겠는가?” (오강남역, 『장자』, 외물(外物)편 중에서). 그러나 내가 제2장 ‘당신의 1제곱인치(inch²)’에서 소개했듯이, 화란의 자유대학 초대 총장 아브라함 카이퍼는 ‘쓸모없는 인본주의’를 다 제거한, 그래서 ‘쓸모있는 기독교’만 남은 천 길 벼랑 길을, 믿음으로 걷자고 우리에게 강권한다. (나는 카이퍼 뒤를 따라 걸을 생각이 전혀 없다). 우리가 살면서 자주 확인하는대로 실패와 성숙, 부끄러움과 깨달음, 인본주의와 기독교가 ‘얽혀’있는 것이라면 후자를 건드리지 않고 전자만을 자르고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전자를 제거하면 우리 삶이 완전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 깊이와 음영 > 이 사라진다. 하나의 쓸모없는 고리를 제거하면, 전체가 풀린다. ‘하이퍼링크’는 ‘텍스트’가 된다. 내게서 실패, 상처, 어리석음, 인본주의가 완전히 제거된다면 그때 남는 나를 나는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4) 지금 막 여자와 K는 사랑을 나눴다. 어느새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진 일이지만 수술 후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질 때면 꼭 여자가 올라간다. 어쩌면 수술 내내 지시를 들었던 간호사와 수술 내내 지시를 내렸던 의사에게 이 보다 더 각자에게 위안이 되는 체위도 없을 것이다. 완벽한 주도권을 행사하며 두 번이나 절정을 맛본 여자는 나른해진 몸을 가누기 힘들어 그냥 K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좋았어?” 여자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스탠드불을 켠다. 눈이 부신지 여자는 잠시 눈을 찡그린다. “당신 화란에 가봤어?” 여자는 수술실 밖에서 말을 놓는다. “네덜란드 화란? 갑자기 화란은 왜?” “아까 그 105호실 수술 환자 있잖아. 그 남자가 수술실 메이요대 위에 놓인 메스들을 보더니 뜬금없이, 메스가 화란말이죠, 그러는 거야. 근데,  메스는 독일말 아니야?” “화란어야. 근데 독일어면 어떻고 화란어면 어때?” “자기가 잘 아는 화란의 대학 총장 한 명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그 사람도 메스라는 이 화란말을 분명히 썼겠죠? 그러는 거야. 메스가 자른다, 라는 뜻이라면서. 그런데 대학 총장이 도대체 뭘 잘랐다는 걸까?" "안 돼. 그만. 나 내일 오전에 발표 있단 말이야. " “그래서 벌써 자겠다고?”

2012. 5.10. 
신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