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신음
(중략) 8월21일 목요일치 < 정오의 문화저널 > 모니터평을 그대로 옮겨보면: “극단 이데아의 작품인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을 소개했는데 ‘밤일’,‘색마’ 등의 성적인 노골적인 느낌이 강했다. 또한 진행에 있어서 진행자들간의 노골적인 표현에 대한 웃음이 많아 진지함이 떨어지는 인상을 주었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면서 난 한 모니터요원을 생각했다. 그는 몇살일까? 남자일까,여자일까? 결혼은 했을까? 그는 ‘진지함이 떨어지는 느낌을 주었다’라고 썼다. 섹스와 진지함. 그는 섹스는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지하철이 서울대역을 지날 무렵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진지한 신음’이란 것이 존재할까? ‘그(!) 신음’조차 진지하게 내야 하는 곳, 그곳은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하는 곳일까?
이항규 박사가 쓴 책 『대학없애야 우리가 산다』. 대학제도에 대해서 다루다가 갑자기 한 독일가정에서 점심먹던 이야기를 한다. 15살된 아들이 밥을 먹다가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 클리스토스가 뭐예요?” 다른 다른 친지들도 있는데 그 엄마,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건 여자의 성기 윗부분에 있는 아주 예민한 성감대야. 너도 나중에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할때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할 그런 곳이야. 그 부분은 모든 여자들이 똑같이 발달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이야기해 줄수는 없고, 하여튼 그 느낌에 대해서는 여자 친구와 항상 대화를 해가면서 그녀의 느낌에 보조를 맞춰가는 게 매주 중요하단다. ” 아들이 짖궃게 또 묻는다.“여자들 모두가 똑같은게 아니라면 그럼 어머니의 경우는 어떤데?” “그것은 아버지만 아시는 비밀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되는....”. 그의 어머니는 웃음으로 받아 넘긴다. 이항규씨의 이어지는 얘기: “그날 점심 식사에서 제일 얼떨떨해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26년의 긴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 교회가 나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자연스러움. 그 자연스러운 대화를 난 읽고 또 읽었다. 그 대화가 아름다워서 눈물이 좀 나왔다. 그렇다. 맥락이 중요하다.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자신의 몸과 욕정과 쾌감에 대해서 웃으며 말할수 있는 여유가. 그 사십대 후반의 여인을 게스트로 초청할수있다면. 그 여인을 초청만 할수있다면!
그날 연극 평론가 이영미씨와 장주희 아나운서는 너무 잘해주었다. 두 사람은 더듬거리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았다. 두 여자가 자연스럽게 웃는 웃음소리를 스튜디오안에서 들으며 난 만족스러웠다. ‘그래, 지금 이 웃음 소리, 몇 개의 성문제 특집 방송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는거야. 이 웃음소리! 이 자연스러움! ’
지하철이 사당역을 지나고 있었고, 난 여전히 ‘신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섯 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째날 밤과 일곱째날 아침 사이에 들어가야 할 구절이 하나 생각났다. ‘듣기에 좋았더라’. 여섯째날 밤에 들렸을 모든 말과 소리.....가 그분의 귀에 듣기 좋은 단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 소리들이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밤에는 진지하지 않다. 아담과 이브, 요셉과 마리아, 그들이 항상 진지하진 않았다,고 나는 믿는다.
1997.9.1.
199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