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13년 4월 4일

진지한 신음


진지한 신음
*1997CBS 라디오에서 <정오의 문화저널>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시절, CBS 노동조합회보에 기고했던 글. 19금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중략) 821일 목요일치 < 정오의 문화저널 > 모니터평을 그대로 옮겨보면: “극단 이데아의 작품인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을 소개했는데 밤일’,‘색마등의 성적인 노골적인 느낌이 강했다. 또한 진행에 있어서 진행자들간의 노골적인 표현에 대한 웃음이 많아 진지함이 떨어지는 인상을 주었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면서 난 한 모니터요원을 생각했다. 그는 몇살일까? 남자일까,여자일까? 결혼은 했을까? 그는 진지함이 떨어지는 느낌을 주었다라고 썼다. 섹스와 진지함. 그는 섹스는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지하철이 서울대역을 지날 무렵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진지한 신음이란 것이 존재할까? ‘(!) 신음조차 진지하게 내야 하는 곳, 그곳은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하는 곳일까?

이항규 박사가 쓴 책 대학없애야 우리가 산다. 대학제도에 대해서 다루다가 갑자기 한 독일가정에서 점심먹던 이야기를 한다. 15살된 아들이 밥을 먹다가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 클리스토스가 뭐예요?” 다른 다른 친지들도 있는데 그 엄마,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건 여자의 성기 윗부분에 있는 아주 예민한 성감대야. 너도 나중에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할때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할 그런 곳이야. 그 부분은 모든 여자들이 똑같이 발달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이야기해 줄수는 없고, 하여튼 그 느낌에 대해서는 여자 친구와 항상 대화를 해가면서 그녀의 느낌에 보조를 맞춰가는 게 매주 중요하단다. ” 아들이 짖궃게 또 묻는다.“여자들 모두가 똑같은게 아니라면 그럼 어머니의 경우는 어떤데?” “그것은 아버지만 아시는 비밀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되는....”. 그의 어머니는 웃음으로 받아 넘긴다. 이항규씨의 이어지는 얘기: “그날 점심 식사에서 제일 얼떨떨해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26년의 긴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 교회가 나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자연스러움. 그 자연스러운 대화를 난 읽고 또 읽었다. 그 대화가 아름다워서 눈물이 좀 나왔다. 그렇다. 맥락이 중요하다.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자신의 몸과 욕정과 쾌감에 대해서 웃으며 말할수 있는 여유가. 그 사십대 후반의 여인을 게스트로 초청할수있다면. 그 여인을 초청만 할수있다면!
그날 연극 평론가 이영미씨와 장주희 아나운서는 너무 잘해주었다. 두 사람은 더듬거리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았다. 두 여자가 자연스럽게 웃는 웃음소리를 스튜디오안에서 들으며 난 만족스러웠다. ‘그래, 지금 이 웃음 소리, 몇 개의 성문제 특집 방송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는거야. 이 웃음소리! 이 자연스러움! ’

지하철이 사당역을 지나고 있었고, 난 여전히 신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섯 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째날 밤과 일곱째날 아침 사이에 들어가야 할 구절이 하나 생각났다. ‘듣기에 좋았더라’. 여섯째날 밤에 들렸을 모든 말과 소리.....가 그분의 귀에 듣기 좋은 단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 소리들이 진지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밤에는 진지하지 않다. 아담과 이브, 요셉과 마리아, 그들이 항상 진지하진 않았다,고 나는 믿는다.

199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