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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7일

황무지 3


1. 20114월에 민음사에서 나온 황무지사서 읽음. 시집의 왼쪽에는 한글 번역, 오른쪽엔 영어 원문. 내가 시작과 함께 큰 감동(이유는 블로그글 황무지 1 참조)을 받은 첫 연에서 황동규는 “Memory and desire, stirring”추억과 욕정을 뒤섞고라고 번역했는데, 내가 볼 땐 굳이 욕정이라고 번역할 필요 없음. “욕망이 더 낫다고 생각함. 그렇게 해서 난 첫 연에서 이미 감동과 불만을 동시에 경험. 그래서, 한글 번역은 참고만 하고 영어 원문을 단어 찾아가며 읽기 시작. 영어 원문이 각주와 해설과 함께 잘 소개된 곳은 http://eliotswasteland.tripod.com. (강추). 진도가 느려 황무지를 다 읽은 건 다음 달 519. 소리와 이미지와 사건의 끊임없는 병치가 주는 쾌감에 크게 감동. 감탄.
 
2. 황무지에서 나를 매혹시키는 것 중의 하나는 뼈(bones)였는데 제4‘Death by Water’에도 물에 빠져 죽은 페니키아인의 뼈를 바닷속 깊은 물결이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옴.(A current under sea / Picked his bones in whispers.) "그가 일어섰다 다시 쓰러진다(he rose and fell)" 천천히. 아마, 영원히, 그런 일어섬과 쓰러짐이 계속될 것이란 생각하다가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어 첫 줄을 다시 읽었더니 "페니키아 사람 플레버스가 죽은 지 2주일...(Phlebas the phoenician, a fortnight dead...)". 달력을 확인하니 그 날은, 미군이 빈 라덴 사살하고 아라비아해에 수장한 지 정확하게 이 주 째. 뼈속까지 전해지던 독서의 쾌감, 전율. 아라비아해 깊은 곳을 흐르는 물결이 지금 한 '아랍인'을 일으켜 세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A current under sea / Picked his bones in whispers.)
 
3. 참고. 민음사판에 And bones cast in a little low damp ground(p.81)라고 나온 부분은
White bodies naked on the low damp ground 라고 바꿔야 함. 3'불의 설교' 에서 The brisk swell /Southwest wind (p.95)로 이어지는 구절들 사이에는 Rippled both shores 를 추가해야 함. 이외에도 철자가 틀린 단어들 여럿.(내가 산 건 1판 8쇄).
 
4. 3'불의 설교'에서 젊은 청년과 관계를 갖는 여성 타이피스트 등장. 자기가 잘 났다고 생각하는 청년은 여자의 반응과 속도와 감정에 신경쓰지 않음. 아주 무례한 놈. "창 밖으로는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마르고 있는 그녀의 빨간 팬티가 위태롭게 널려있다. " (Out of the window perilously spread / Her drying combinations touched by the sun's last rays). 원문에는 combinations라고 나오는데 컴비네이션이란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아 가슴에 와닿는 red panties로 바꿔보았음. 그리고, 엘리엇 흉내내며 이런 구절 만들어 봄. "마지막 햇살을 받고 있는 / 카르타고 전장에 나부끼는 붉은 깃발". 황무지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함. 끊임없이 다른 사건, 다른 세계, 다른 이미지, 다른 음성으로의 이어짐. , 그 콜라주가 너무 능숙하고 매끄러워, 때로는 너무 기교적,이란 느낌이 들 때 있음. 기교를 조금만 덜 부렸으면 어땠을까. 읽어보니 지금 내 글도 그러함. 약간 창피.